에세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해처럼달처럼 2012. 2. 16. 15:50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 6장 33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5-17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 :3

 

 

보편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함에 있어 믿음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봉사, 수고와 애씀, 전도, 선교, 헌금, 그 외에 믿음으로 행하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 모든 것 등 등...

물론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곧 그 나라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전체를 잘 살펴보면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동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이리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모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들이란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써 우리(자녀된 자)의 의무이자 책임, 나아가 그 분의 말씀 앞에, 그 분의 권위 앞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종은 곧 하나님을 하나님 됨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은 무엇일까요?

'The Kingdom of God'은 하나님의 통치 중심인 보좌와 왕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말씀하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하신 것처럼 어느 특정 지역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에서 '바실레이아'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The righteousness'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신칭의의 의인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의는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죄 없으신 오직 홀로 의로우신 예수님(복음; 롬 1:17)을 말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함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 관계의 회복은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죄 많은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 주시는 관계에의 회복입니다.

 

의라 함은, 우리는 본래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기에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알지도 찾을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엡 2장 참조)

의가 무엇인지조차도 알지 못하던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이것이며 저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요.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바로 이 말씀처럼 우리는 자기의 의를 세워왔고, 또 세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음은 순전히 그 분의 은혜요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의며, 교만입니다.

 

-- 남가주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댈러스 윌라드 박사는 세상이 말하는 정의와 성경이 말하는 의, 즉 '디카이오수네'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크리스천들은 이 디카이오수네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윌라드 박사의 지론이다.
윌라드 박사가 말하는 디카이오수네는 그의 탁월한 작품인 ‘하나님의 모략’에도 나온다. 책에서 그는 디카이오수네를 ‘한 사람을 진정 옳거나 선한 존재가 되게 해주는 그 무엇’이라고 풀이한다.
책 내용을 옮겨본다. “창세기 15장 6절은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디카이오수네)로 여기시고.’ 이사야에도 있다. ‘우리의 의(디카이오수네)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64:6). 아모스에서도 볼 수 있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디카이오수네)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5:24) 바울에게 있어 예수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다키이오수네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롬1-8장). 하나님이 ‘진정 선하신’ 분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인격과 우리를 위한 죽으심이다.”  -이태형 칼럼에서 --

 

그의 나라를 구함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교만하여 죄악 가운데 내맘대로 살아가던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고 통치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며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을 받겠다고 고백하며 나를 내어놓는 것이요,(요한복음 3장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참조)

그의 의를 구함은,

“의 되신 예수님, 예수님이 아니면 나는 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여전히 나의 의를 세우며 살아가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 의를 알고 또한 믿게 하시고,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이신칭의를 얻어 예수님과 함께 의로운 자의 반열에 세워 주옵소서.”라고 예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이사야 선지가 말하듯이 더러운 옷일 뿐입니다.

그 더러운 옷을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은 거룩한 세마포(청함받은 자가 입은 예복)로 갈아입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에 있어 보편적인 은혜가 있고 특별 은혜가 있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의 나라(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 등)는 보편적인 것으로 누구나(믿지 않는 이들도) 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구하고 찾는 것이,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곧 특별 은혜와 같은 이치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치하여 주시고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그 의로 살아가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떠한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그것으로 자랑하지도 마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일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길가의 돌멩이를 들어서라도 하시는 분입니다.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그른가, 이것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라고 함부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을 기만하는 일이며, 그 일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는 그 분을, 그리고 그 분의 심판대 앞에 있는 저울을 무서워 할 수 있는 진실무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해처럼달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