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언어는 곧 마음의 표현이다.

해처럼달처럼 2012. 11. 6. 12:49

 

사람사는 이야기 그 두 번 째 / 인종과 언어

 

 

언어는 곧 마음의 표현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서양인을 볼 때 ‘서양 귀신’이라 하던 것이 불과 100여년도 안 된다.

동양인들에 비해 체질이나 생김과 언어가 다르고, 시퍼런 눈을 가지고 있으니 그 옛날에 그들을 보면 누구라도 그런 말을 했을 법 하다.

게다가 시꺼먼 흑인들을 보면 어떠하였을까. 백인들이 그들을 노예 취급하며 사람으로 보지 않고 대하여 왔던 것도 십분 이해한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내면이 아닌 우리들 겉에 나타나는 외관을 보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옛날에 내가 서양인들을 보았더라도 ‘서양 귀신’이라 했을 것이고, 흑인들을 보았으면 짐승이라 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들은 어떤 사물을 대할 때마다 그 모양을 보는 일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세계에는 64억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들은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미국이야말로 온 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곳으로 가만 앉아서도 온갖 인종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허긴 자그마한 우리 나라에서도 사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언어의 종류는 상당할 것이다.

세계의 민족은 인류를 언어/종교/풍속/습관 등의 문화적/사회적인 특징이나 공통성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인종의 구분을 쉽게 표현한다면 백인, 흑인, 아시아인, 히스패닉, 기타이다.

인종은 이와 같지만, 종족은 언어 숫자만큼이나 많다. 현재 지구상의 언어는 7천여 가지가 넘는데, 종족이 다르므로 언어도 다른 것이다. 인종과 종족 수는 1만 여 종이 넘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 미국 내에서 드러난 언어만도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지금은 전 세계가 하나 되어 살고 있는 정보 공유화 시대이기에 인종이나 언어의 문제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나, 아직도 민족별로 우월성을 따지고 더 부강해지고자 하는 것은 여전하며,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의 심각하고도 처절한 투쟁은 계속되어지고 있다.

 

이 아메리카 땅은 인디언을 제하곤 모두가 다 이민으로 와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 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집 떠나면 고생이다”

그렇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고생을 해 본 사람만이 진정한 낙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이민 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참 힘들다. 물론 개중에는 쉽게 가는 사람들도 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이민을 와서 객지의 설움을 덜며 사는 사람들도 많다.

나처럼 달랑 한 가족만 와서 외롭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개중에는 남자들이, 또는 여자들이 이민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는 모습들도 종종 본다. 흔히 말하는 기러기 가족들의 아픈 사연을 자주 접하며 살고 있다.

 

 

인종이나 언어가 하나 되었더라면 인류의 문명은 더욱 발전되어져 있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 바로 이를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살고 있던 그들은 서로 흩어짐을 면키 위하여 애를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을 흩어놓으셨다. 거기에는 본래 창조적 의미가 크게 두 가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땅에 번성해야 했다. 흩어져 살면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아야 했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 구원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죄인됨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살았기에 하나님은 그 사건에 개입하시어서 그들을 흩어 놓으셨다. 그 흩어 놓으심의 중요한 것은 바로 언어였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우리는 많은 부분 오해라는 것을 하며 살아갈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말을 사용한다.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그렇다. 인종이 문제가 아니라 언어가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이다. 어떻게 상대방을 수용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사람들간의 행복순은 정해진다.

본래 언어란, 의사소통을 위한 기호체계이다. 인간의 소리에 의한 음성언어를 말하지만, 몸짓 등 소리 이외의 요소도 포함된다. 물론 우리의 언어도 조심해야 한다. 두 번 말할 것을 한번 말하고, 상대방도 헤아려 주는 지혜와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인종과 언어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나누어 주며 사는 것이 인류사에 있어 더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지혜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글이 일목요연하지 못하고, 꽤나 오락가락 했다. 요즈음의 내 마음 상태와 어찌도 이리 같은 지....

 

*한국신춘문예 가을호에 실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