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요즘 목사는 배가 고프다
어느 때 부터일까?
'목사'가 '먹사'로 불리웠을 때가...
목회를 하다보면 자주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게 된다. 자녀 출생을 시작으로 해서, 온갖 집안의 대소사 일에까지 초청을 받아 예배를 인도하고, 게다가 정기적인 심방, 구역예배 등 그렇게 자주 성도들의 가정을 출입하다보니 "그 집안에 숟가락 몇개 있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집안의 형편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1차 모임 후에는 으례 2차가 성립되는데, 2차 모임은 바로 먹는 모임이다. 참 이상한 것은 2차 모임이 없으면 괜히 허전한 것을 느낄 정도로 정례화 되어 있다.
전도사 시절 때다. 그 때는 아직 신학생 때이기도 해서 더 순진하고 신앙적으로도 한참 뜨거울 때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구역예배나 가정 심방을 다니면서 음식이 나오면 그것 자체가 거북스럽고 민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넉넉한 가정에서야 주님의 종을 하나님 섬기듯 대접하는 거야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집안에서는 접대 그 자체가 또다른 시험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엘리 대제사장이 너무 몸이 비대해져서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을 만큼의 음식 욕심을 보고는 '나는 절대로 음식 욕심을 내지는 말아야겠다'라고 마음 속으로 작정하기도 해봤다. 본래부터 밥그릇(胃)이 적은 그릇을 갖고 태어난 지라 지금까지도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러오는 탓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그 마음의 약속은 아직까지는 잘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목회자들이 자주 심방을 하고 성도들을 만나다보니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서 정말이지 신실하고도 진실한 목회를 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참으로 좋다. 목회자는 그들의 내면 영혼 깊은 곳까지도 바라보게 되고, 진실한 맘으로 그들의 복을 빌어주게도 된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저로 하여금 사람(성도)들을 사람으로만 보지 말게 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바라보며 저들의 영혼이 갈망하고 바라는 것을, 그리고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영안과 깊은 차원의 믿음을 달라"는 것이다.
그럴려면 아무래도 목회자와 성도간에 깊은 교제들이 자주 있어야 하는데(뭐 자주 먹는 모임을 갖자는 것은 아니다. 교제가 꼭 음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목회자들은 예전처럼 그렇게 성도들의 집안 사정내지는 속 사정을 잘 알지를 못한다. 그저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것 외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양심도 많이 각박해진 것 같다. 그 순수하고 뜨겁던 열정적이던 신앙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 간에도 서로 물고 뜯고 하는 비판 때문에 기도제목을 내 놓으라 해도 내어 놓아서 욕이 되지 않을 그런 제목만 내놓는다.
나아가 목회자까지라도 알까봐 집안 일을 쉬쉬한다. 목회자는 더욱 더 성도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게 그리 쉽지를 않다. 그냥 "당신은 당신의 사역인 말씀만 잘 전하면 되지 남의 집 일까지 간섭하지 말라"는 식으로 변한 지가 오래다.
특히 미국의 신앙 문화가 그러하다보니 목회자들도 더 이상 굳이 신경을 쓰려 들지 않는다. 한 마디로 네 일이 아닌 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목회가 성경이 요구하는, 양을 치고 먹이는 그런 목회가 아니라 하나의 비지니스가 돼버린 것이다. 성도들도 "목사는 설교준비나 잘 해서 성도들 귀에 듣기 좋은 설교나 잘 해 달라"는 식이다. 일에 치여 바빠 죽겠는데 자주 보는 것도 고역이란다. 그래서 요즘 목사들은 배가 고프다. 목사의 배부름은 바로 많은 성도들을 만날 때만이 가능하다.
목사는 적어도 그 교회에 있어 영적인 부모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가 배불러 할 때에만이 참으로 부요함을 느낀다. 자녀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는 부모들은 배가 부를 수 없다. 성도들도 이런 이치를 깨달아 우리 목자야말로 참 목자로 알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요즘처럼 교회 옮겨다니기를 밥먹듯이 하고 목회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시대에서야 어찌 목자의 올바른 상이 정립되고, 진실한 목회를 하며, 배가 부를 수 있겠는가.
지금도 목사는 성도들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얼굴 한번이라도 더 보고싶고, 목소리라도 한번 더 듣고 싶어한다. '먹사'의 욕심을 내어 만나보고자 함이 아닌 '목사'로서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들을 불사르며, 얼굴에 두터운 탈을 뒤집어 쓰고서라도 밤낮으로 양들과 함께 함께 하기를 원한다.
참 양은 목자의 소리를 듣고, 그 목자를 따를 것이다. 아직도 목자의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면 내 심령 어느 구석엔가 잘못된 점이 있지 않나 돌아보면서 목자가 내게로 나아오기전 더 가까이 목자에게로 갈 수 있는 양들이 되어보자.
조금씩만 더 가까이 가보자. 목자는 성도에게, 성도는 목자에게, 나아가 성도와 성도 간에 한걸음씩만 더 가까이 간다면 진정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리라.
2001년 6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