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파리의 연인

해처럼달처럼 2009. 4. 15. 06:57

 

누가 그랬나? TV를 보고 "바보상자"라고.
정말 그런가? 바보상자를 보고 바보처럼 웃고 울고 그랬나?
난 정말 바보인가보다. 나이가 오십인데도 아직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다니.... 허허 참.
오늘 '파리의 연인' 17회와 18회를 봤다. 아들이 컴에서 다운받아서 그동안 1회부터 함께 봐 왔다. 여기서는 그걸 볼려면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다 봐야 한다. 가게에는 아직 10회까지만 나와 있다.
18회에서 강태영이 한기주에게 약혼 파혼을 선언하고 둘은 괴로워한다. 그 무겁게만 보이는 한기주가 누나(실은 어머니)에게 가서 울먹이며 힘들다고 말할 때, 그리고 강태영이 혼자 흐느끼며 눈물을 흘릴 때, 정말 눈가에 눈물이 맺혀왔다.
난 TV, 그리고 '파리의 연인' 예찬론자는 아니다. 내가 예찬한다고 해서 누가 더 볼 것도 아니고, 그 방송이 하루아침에 시청자들을 더 끌어올릴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눈물을 더 흘려보자"이다. 눈물을 예찬하는 것이다. 눈물처럼 강한 무기도 없다는 말도 있다.
우선 그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늘 같은 식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식상해 있는 세대에서 다시금 사랑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 나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랑하기에 따르는 희생이 더 값어치가 있다. 거기에 진짜를 볼 수 있다. 희생없는 것은 울리는 괭꽈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내가 지금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올 수 있다"고. 그리하면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보다 희생을 선택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확증을 아들을 희생하는 자리에 내어줌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TV(바보상자) 앞에 매달려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고. "한 작가의 작품(농간)에 의해 웃고 울고 하는 어리석은 일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감히 한마디 묻고 싶다. 바보상자도 안 보고 책도 안 보고 하는 그 시간에 과연 그만큼 주님을 위해,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자그마한 것을 보면서, 그것이 드라마라 할지라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희생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세대를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한탄하셨다. 지금이 그런 세대가 아닌가?
지금처럼 강팍한 세대에서 눈물좀 흘리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좀 흘리자. 이 민족과 나라와 자녀들과 나의 영혼을 위하여 눈물을 좀 흘리자.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보다도 눈물을 더 기뻐하신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예레미야 9장 1절)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예레미야 애가 2장 11절)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18절)

 

   2004년 8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