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나아 오십시오.
빛으로 나아 오십시오.
요일 1 : 5-7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어젯밤엔 어두운 밤거리를 혼자서 헤매이고 있었습니다.
여늬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저도 여러 가지 답답한 일을 당할 때면 그렇게 방황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니다보니 어떤 곳은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이 빛나고 있었고 또 한편 어두컴컴한 쪽에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하며 다툼이 일어나 시끌벅쩍한 골목길도 지나가 보았습니다.
거리 거리마다 우리의 눈을 요란하게 하는 다양한 색깔의 불빛들이 번쩍거리고 있었고, 쇼 윈도우(show-window) 안에는 각종의 옷들이며 금가락지와 목걸이 등이 지나가는 여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사이사이로 노래방과 나이트 클럽 등 휘황찬란한 불빛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들을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사실은 음식 맛도 칼칼하면서도 담백한 것이 좋은데 매콤한 것들을 좋아하는가 하면 오락이든지 놀이터에 가도 윙윙 돌아가는 것들을 타며 짜릿한 맛들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도 싸움을 하며 지나치다 못해 정도를 넘어서서,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채 무섭게 다투다 못해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진리란 어떤 특별한 일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평범한 일상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무미건조해 보이고 또 무기력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그런 생활들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리고 모두가 다 특별한, 별난 삶을 산다고 하면 이 세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참 길을 걷다보니 극장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극장 앞의 영화제목과 선정적인 그림들을 보는 순간 마음에 충동을 받아 극장엘 들어 갔습니다. 개봉극장도 아니고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도 아니고 2편씩 보여주는 주로 성적(性的)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극장 입구에는 예외없이 '미성년자 출입금지'란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인 저로서는 그 글귀가 마치 '기독교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처럼 보여 왔습니다.
사실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지 말아야 될, 그리고 보지 말아야 될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바라다 보고 때론 마음 속으로 동경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곤 그러한 행위들을 무마 내지는 변호하기 위해 사람의 본능이 그런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를 달래며 너무도 쉽게 그런 것들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은 본래 사람의 본능이 아니라 “타락된 본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타락된 죄의 산물(産物)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어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본능인 것처럼 위장하고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래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들 본능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지요. 성경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모든 문제나 다툼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하에서 이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아닌 것 가지고는 사실 다투어야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 본래적 본능이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한편으론 이래선 안된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의를 세우고자 하는 본래적 마음이요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거리를 헤매이며, 어두운 모습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저 나름대로 느낀 것은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더더욱 깊은 어두움으로 인도할 뿐이지 결코 그것이 우리를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어두움이었고 불순종이었습니다.
여전히 어두움을 향하고 있는 우리들, 어두움의 자리에서 돌이켜 빛으로 나아와야 하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둡기만 하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며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아직 잠시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자그마한 죄는 점점 더 큰 죄를 불러 옵니다. 자그마한 것을 쉽게 허용했을 때 큰 것도 허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에 바늘도둑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또 불이 나더라도 자그마한 성냥불 하나가, 그리고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 하나가 큰 불을 가져와 엄청난 피해를 안겨다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죄, 이번 한 번만이라고 하는 엄청난 무서운 생각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그 분을 구해 나가는 작업들이 우리 삶 가운데 있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실 어두운 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둠이라고 하는 단어가 곧 잘못된, 그리고 죄를 대칭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대부분의 죄악들이 어두운 밤에 자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들은 이 어두운 밤도 사랑해야 될 줄 압니다.
낮과 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지어 놓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밤이 없고 낮만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부질없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밤이 없다면, 그러지 않아도 피곤한 우리 인생들이 언제 조용히 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피곤한 인생들을 쉬게 하시려고 밤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밤하늘을 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왔습니까.
지금 이 어두운 밤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밝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은 반드시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환한 빛으로 우리 어둡고 상한 심령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밤, 조용히 무릎꿇고 어두움에 물든 나를 빛되신 그리스도 앞에 내어놓고 그 분을 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 해처럼달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