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펌글)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는 글

해처럼달처럼 2010. 9. 9. 04:00

 

옥한흠 목사님의 우려남긴 말씀

 

며칠전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나는 그분의 연세가 얼마쯤 되었나 하는것도 모르고 있었는데요.

그러면서도 그분이 세우신 교회 사랑의 교회에서 보내주는 성가는 줄기차게 듣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직접 한번 가서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한번 들어야 하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안타깝

게도 돌아가시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목사가 설교를 잘하나, 목사가 언행을 바르게 하나 하는 것은 성도가 따지거나 흠잡을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그러니까, 목사의 잘못은 하나님이 기름 부음의 축복을 주신 이후의

하나님의 사자이기에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지 예수님의 제자 판단하거나 감히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다시말하면그는 대학이나 중등학교의 교사처럼 평가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거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인들 말처럼 개독교먹사라는 어휘적으로 따지기 위해 아니라는게 아니구요.

우리가 예수님을 받기 위해 사는 제자라는 말이 성립하는게 기독교인이라면 ?

옳고 그름을 알아야  물론, 예수님은 그릇된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옳은가얼마나 옳은가 그것도

불경한게 아니라는 전제하에 배우기 위해서 자주 겨냥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전에 옥한흠목사님도  바울의 삶을 본받기 원한다 하셨다던데요.

바울을 본받아야 하는건가요?

그는 로마관료시절에 스테반이라는 예수님의 제자를 돌로죽인 사람입니다. 이전까지는 많은 못된 짓을 하였었지요.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악행이란 것을 어느날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이후로는 거의 미친듯이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깨닫기 전의 바울과 깨닫고 난 후의 바울을 비교조차 하지 말라는건가요?

그걸 비교해야만 우리가 깨달음을, 다름을 확연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리가 잔뜩 넘치는 목사와 사랑이 철철 넘치는 목사님을 비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누가 비리 있고, 악한 목사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란 것은 아시지요?
용어를  좀더 정의하려면 목사와 목자의 차이를 알아야 같습니다.

목사는 여기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구요.

목자는 조금 남다르게 적나라한 비유가 필요하겠는데요?

언제인지 모르지만,  어느 교회에 제가 다닐때 공부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목자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누구를 일컷는 말이냐고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분이 잽싸게 목사님들이 목자입니다고 외쳤지요.

듣기 위한 대답이 나왔다는 얼굴에 화색을 띄며 목사님이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다른 분이 갑자기 손들더니 목사님들은 양떼를 지키는 같은 역할을 하는거고  목자는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고 큰소리로 정정을 했지요.

좌중은 모두 웃으며 얼굴이 벌개지는 목사님을 쳐다보느라 민망해 하고 있었는데요.

목사님은 없다는듯이 , 좋다 말았네저는 옛날 부터 목자가 되고 싶었는데…….목사가

되어서 내가 목자인가, 아닌가, 하며 고민을 했었지요마는 오늘에서야 목자牧者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겸연쩍게 양보하듯 마무리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저도 과연 목사님들은 목자가 없는 걸까 하고 고민했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에 대하여 간간히 듣던 그의 생전의 메세지 중에서 제가 가장 고인목사님을 귀하신

분이라고 여기게 되었던 계기는 베스트셀러인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되는 대한

우려를 하고 계신다는데 대해 듣고 부터입니다.

속세인들은 옥한흠목사님보고 나쁘다 할 것입니다.

긍정의 힘이야 말로 낙천적이고 환한 천국지향적으로 세상을 살면 안되는 것도 되고 성공 못 사람이

없다는 가르침인데 어째서 그게 나쁘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오스틴의 논법은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추구하고 따르는

것이고 그렇게 세상 속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것이라면 기독교인을 위해

더이상 좋은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말해현세에 만족하려고 믿는게 기독교가 아니며,  무엇이나 믿고 구하면 이룬다는 소원성취의

말이나 좋아하고, 예수 믿는 목적이 마치, 무병장수나 부귀권세에 있는 것처럼 물질 만능주의를

잉태하는 기복신앙적 길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과 속세인의 차이가 주일날 교회에 나가고 안나가는 정도의 차이라 한다면 나는 감히

이교도인이고 싶다고 한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뭉뚱그린 뜻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물질 만능 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볼때 한국은 너무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그럼에도 살려고 기쓰다 못해 울부짓고 있는듯 측은해 보입니다. 물론, 미래가 보장 안되어 대그룹의 이사가 하루아침에 명퇴당해 30만원의 연금이 고작이라는 암울한 소리도 들립니다.

그는 빈부의 격차가 심할 뿐이지 경제 상황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가진 사람은 나누어 주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대그룹의 총수의 조카가 자살했을 때도 죽었는지 알아보기에 앞서 적자생존’ ‘곁가지를

잘라야 본체가 산다 식으로 부익부 빈익빈 당연한 경제논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나스닥인지 코스닥인지 주가를 떨어뜨리면 죽일놈이 되는데, 사촌을 죽게하거나 조카를 죽게 하는건

임박한 파티 한번 걸르지 않아도 되는 남의 일입니다.

 

인은 말씀하시기를 단 것만 좋아하는 한국사회라고 하셨습니다.

혹자는 단군이래 가장 잘사는 나라, 시대를 맞이했다고 큰소리치며 살게 하겠다고 합니다.

절대로 절대로 계속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기복을 받아 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큰일 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제게 따지려 들지도 모릅니다.

어려울 일수록 빛과 힘을 발휘하는 종교이고, 기독교가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미리, 닥쳐올 환난에 대해 준비해야만 합니다.

불황과 기근과 고난이 한꺼번에 닥칠 수도 있습니다.

 

한나라에 그런 어려움에 대처할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나라가 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선진국인가, 후진국인가 결정될 것입니다.

솟아오를 준비만 되어있는 누질러진 용수철처럼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는 사회, 나누지 않고 쌓아만

두다가  굶겨죽이고 자신은 치어죽을 사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귀와 명예에 식食, 색色, 욕慾이 따라다니는 사회그런 사회가 바로 망할 사회의 표본입니다.

공직자, 가수나 탤런트운동선수들이나 그를 조종하는 자들이 가장 잘사는 사회 그런 곳이 , , 욕이 만연한 망할 사회입니다.

목사도 가수나 탤런트운동선수, 그를 조종하는 자들이 되려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로써,

목사가 목자牧者인지 양의  주위를 맴돌다가 짖어대고 물어뜯는 개犬정도 인지는 자명해 졌습니다.

부유한 교인들이나 장로권속들이 잘못하면 그를 꾸짖다 못해 그런 장로권속들의 폐해에 의해 시들어

져간 나머지 헤매이는 양같은 성도들을 어둠으로 부터 구해내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여 항상 성도들의

신앙을 일깨워 병고와 빈한속에서도 신앙의 참의지를 잃지 않도록 영양가 있는 말씀의 풀이 넘치는

초장으로 인도하는 목사라야 목자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면에서 옥한흠목사님은 훌륭한 목자이셨습니다.

 

 먼산바라기 / 2010 9 2일 밤 / 토론토에서 / Old Ba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