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펌글)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

해처럼달처럼 2009. 10. 25. 13:07

 

아래의 글은 함께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나오는(약 한달 정도) 북한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젊은 부부(간증은 남편이 함)의 글입니다. 교회에서 발행하는 간행물을 편집하던 중 함께 나누고 싶어 가져왔습니다. 제가 주일마다 함께 데리고 교회를 가고 있습니다. -해처럼달처럼

 

김철(가명)

 

저는 1979년 강원도의 한 작은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형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군부대 공장의 보위부에서 일을 하셔서 내가 자랄 때에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집안으로 근심 걱정 없는 풍족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부터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몹시 앓으시면서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팔게 되었고,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아버지는 공산당원이라 장기 출장을 자주 떠나시곤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병환이 깊어지면서 평양 외갓집으로 진찰을 위해 떠나셨고, 형은 군에 입대를 하여 집에는 13살 된 저와 6살 된 여동생이 남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물품 대부분은 어머니의 병원 비용을 위해 모두 팔아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텅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배급도 잘 나오지 않아서 남아 있는 쌀을 조금씩 먹고 산과 들판의 풀, 칡뿌리, 소나무 송기(나무 껍질)와 콩 짚과 옥수수 나무를 부수어 먹었으며, 그것도 없으면 감자 잎을 우려서 먹기도 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지 짐승들이 먹는 것을 다 먹으며 살았으니 짐승과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마음 속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께서 대수술을 끝내시고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위해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수술하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강냉이 이삭을 훔치던 일, 추운 겨울에 온 몸을 꽁꽁 얼려가며 마을 아주머니들을 따라 장사하던 일, 학교를 졸업하고 기능공 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와 집안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군수창고에서 특수 강철 5톤을 훔쳐서 원산항에 있는 일본 배에 팔려다가 보위부에 적발되어 아프신 어머니와 여동생만을 집에 남겨 두고 집을 나온 일이 지금도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집을 나오는 그 때가 19살이었습니다.

피눈물 흘리며 금 캐는 광산, 탄광, 산골의 벌목장들을 돌며 한 끼 두 끼의 끼니를 위해 일하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기만 합니다. 평양시 곳곳을 헤매며 밥을 빌어먹던 일, 전국을 방향없이 헤매던 일, 두만강 일대의 모든 산골들을 다니며 농사 일을 해주며 하루 하루 살아 나갔습니다.

북한의 각 지방들을 돌아다니느라 기차 지붕 위에서 꽁꽁 얼고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바람이 부는 대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무산에서 대흥단으로 온 몸이 얼어 걷기도 힘든 상태에서 빌어 먹으며 밤에는 잘 곳이 없어 눈 오는 날에 남의 집 강냉이 짚 속에서 부들부들 떨며 밤을 지낸 일, 량강도 대흥단에 도착했으나 집을 찾지 못해 눈 쌓인 벌판에서 눈더미를 헤집고 보리 짚을 파고 그 속에서 자다가 얼어 죽을 뻔한 일,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패 주고 남의 집 허드레 일을 해주며 지낸 일, 숲 속에서 약초와 들쭉을 따다가 팔아 목숨을 연장해 왔던 일들이 눈에 선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중국에 밀수를 하기 시작했으나 경비대에 걸려 물건 모두를 빼앗기는 등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고통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중국은 잘 살아서 고기와 (쌀)밥을 먹으며 돈도 잘 번다고 하여 2001년 5월에 중국 연변의 안도현과 이도백화림장 쪽으로 탈북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800원을 모았습니다. 돈을 손에 쥐고 보니 어머니와 여동생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돈을 갖다 주려 하였으나 친구가 고발하는 바람에 돈도 전해주지 못하고 2002년 5월 북한 보위부에 체포되어 자강도 만포 집결소에서 6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던 중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다시 잡혀서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그곳에서 너무 맞아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2003년에 집으로 호송되어 온 지 20일 만에 다시 체포되어 평안남도 증산군에 있는 11호 교화소에서 또 다시 힘든 교화 생활을 하였습니다. 교화소에서는 나를 탈북자라 하여 “너는 죽어서도 못나간다”며 나를 심하게 취급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면식을 먹을 때 나는 너무 배가 고파 중국에서 잘 먹던 일들을 떠올리며 참아야 했고, 논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배고프면 생개구리와 미꾸라지, 물딱지를 닥치는 대로 잡아 먹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몸은 점점 약해져 갔고, 감옥의 병반(죽음의 감옥; 대다수 죽어가는 방)으로 옮겨져 생활하며 교화소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험한 곳에 나를 찾아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 죽음의 감옥에서 나를 빼내셨습니다. 오늘 내일 죽는다고 하던 나를 살린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보로 인해 집에 오니 온 집안이 추방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이 다 죽게 되었다고 통곡하시며 5kg의 옥수수를 빻아 오시며 힘들어 하셨던 어머니가 아린 마음으로 기억납니다.

집안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집안을 살리겠다는 각오로 나는 병보로 나온지 15일 만인 2004년 11월 30일,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북한을 탈출하여 추운 날씨에 강원도 원산과 고원을 거쳐 함흥, 부전, 량강도 신파, 혜산, 보천을 거쳐 백암까지 25일 동안 지팡이 집고 밥 빌어 먹으며 추운 들판에서 자기도 하고 아는 집에 신세를 지면서 12월 31일 영하 40도가 내려가는 그 때 백두산 보호 구역으로 누더기만을 걸치고 들어가 중국 장백산에서 인가도 없는 빈 산전막에서 언 무와 배추를 갉아 먹으며 발은 꽁꽁 얼었어도 아픔을 참고 살겠다고 8일간의 고생 끝에 2005년 1월 8일 조선족 마을에 들어가 교회 전도사님의 도움으로 100원의 돈을 받았고 그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는 집에서 그 분들의 도움으로 15일 동안 몸을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 뒤 또 다른 조선족 마을로 자리를 옮겨 좋은 분들을 만나 살던 중 라디오를 통하여 미국에서는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인다는 방송을 듣고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가는 길을 찾겠다고 있는 힘을 다해 일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족 사장이 경영하는 돌 캐는 석장에서 손에서 피가 나도록 일하여 두달 동안 번 돈 500원을 달라 했더니 돈은 주지 않고 경찰에 고발하여 다시 탈출하게 되었으며 료녕성 심양에서 지금의 아내 순희(가명) 씨를 만나게 되어 그녀와 함께 중국의 수많은 곳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 내몽고 자치주,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하북성, 사천성, 관동성, 운남성, 광시성, 국제 도시 북경, 상해를 포함하여 거쳐 온 마을들이 몇 백군데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면 교회에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교회들을 찾아 다녔지만 미국행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너무 힘들어서 사랑하는 여자를 중국인들에게 팔아 볼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이 아파 포기하고 돈 빌리러 밥 빌리러 많은 교회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 만난 선교사님을 통해 성경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만 믿으면 살 것이다’라고 결심하고 탈출을 시도한 또 한 명의 여자와 함께 두 명의 여자를 데리고 지도를 보면서 가시밭길을 헤치며 베트남 국경을 넘었고, 또 다시 캄보디아 국경을 넘었습니다. 함께 온 여자는 미국행을 포기하여 한국 대사관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바깥에서 20일을 헤매다 미국으로 오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숱한 고생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2008년 4월 17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 까지만 해도 나는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축복 속에서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북한에 계시는 부모 형제와 동포들이 더욱 그리워만 집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모습이 말입니다.

 

비록 짧은 글을 통하여 고백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동안 빌어 먹으며 주워 먹으며 살아왔던 이 죄인들을, 악만 남아 있던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시고 이 자유의 나라 크리스찬의 나라로 인도하신 줄을 믿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께 감사하고 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친 형제처럼 맞아 주신 성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집을 나와 미국에 안착하기까지 11여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을 하나님의 품에 안아 주시고 새 생명 주심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은 북한의 인간 최악의 현실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을 온 교회와 세상에 선포하며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