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버지 가지 마세요!

해처럼달처럼 2013. 7. 8. 04:08

 

 

                                         

 
 
 
"아버지 가지 마세요!"


어릴 적 내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 같았다.

내 나이 8살로 초등학교 1학년 때 15년 여 이상 앓아 계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버지의, 그리고 남편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씩을 둘러보시고 그리고 나를 돌아다 보셨다.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그리고 나와 여동생...

차례 차례 자녀들을 둘러보시던 아버지는 나를 보시며 내 손을 잡아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 때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곤, 그 아버지의 손을 차마 잡지 못하고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죽는 그날까지 한이 되어 지금도 내 마음속에 응어리 되어 남아 있게 될 줄이야....

 

지금도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가시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 돌아가시면 안돼요. 가지 마세요!”라고 말을 하지 못했는가 라고....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어려서 아버지와의 잔 정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린 아버지의 자녀였지만 아버지와 알콩달콩 재미있고, 정과 사랑이 넘치는 그런 시간을 보내었던 기억이 없다.

그 이유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기 이미 오래전부터 병마와 씨름하며 살아오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의 배가 복수로 차 올라서 배가 잔뜩 불러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5남매의 자녀를 둔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 수발을 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당시 충주 근방 시골에 살던 우리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데리고 충주로, 서울로 병원을 다니시던 기억 뿐이다. 나와 여동생은 동네 어귀에서 버스가 다니는 저 멀리의 신작로를 바라보면서 아버지가 어머니가 저 버스에 타고 오실 까 하며 버스를 바라보고 기다리던 생각이 떠오른다.

 

본래 아버지는 건강하셨던 분이다. 일제 시대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큰 형 하나를 둔 상태에서 아버지는 반강제적 징병으로 일본 군대에 들어가게 되어 남양 군도(지금으로 말하면 필리핀 군도였던 것 같다.)에서 전쟁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들과 함께 고향에 남아 있던 어머니는 해방이 되었으니 남편과 아버지를 곧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살아가셨으나, 아버지는 몇 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 보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 홀로 고생하지 말고 재혼하라고 권유하시곤 했단다.

그래도 어머니는 남편은 살아 돌아오실거라고 굳게 믿고 기다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병을 짊어진 채 시커먼 몸을 이끌고 나타나셨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 홀로 본국으로 돌아가기에도 급급해서 다른 민족들을 그들 본국으로 데려다가 줄 여유가 없었다. 배편도 항공기도 없었던 그들은 그 먼 거리에서 걸어서 걸어서 오는 길 밖에는 없었다.

지금 그것을 생각해 보아도 참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나침판도 없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그 먼 길을 어찌 고향을, 아니 가족을 찾아 오셨는지 말이다.

그렇게 2년여가 넘는 세월을 걸쳐 풀포기, 나무 껍질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가며 돌아온 아버지는 간경화에 걸려서 거반 죽은 몸으로 돌아오셨다.

그래도 어머니의 정성어린 병 수발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며 건강을 추스르고 작은 형을 비롯한 자녀 4남매를 더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깊은 병을 얻은 아버지는 결국 오랜 세월을 앓다가 50세라는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의 귀염과 사랑을 받을만한 처지도 못된 채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차마 그것이 미안하셨던지 돌아가시는 순간 아버지는 나의 손이라도 잡아보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그마저도 거부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아니 지금도 나는 꿈에서라도 다시 한번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만난다면 그 때 잡지 못했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부르며 손을 잡지 못했던 그 순간을 용서라도 구해 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 나는 어느 뷰잉예배에 참여하고 있었다.

고인이 된 그 친구는 아직 젊은 40세라 들었다.

본래는 한국에 살고 있으나 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한국에서부터 치료를 겸하여 쉬고 있었고, 바람 좀 쐬고 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의 병원을 찾아온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던 그는 내가 출석하고 있는 안디옥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안디옥교회의 예배와 성도들을 너무나 사랑하여 온 가족이 시간 시간마다 은혜를 받으며 예약된 삶의 시간안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즐거이 만들어 갔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홀로 겪어야만 되는 아픔을 삼키우면서 그를 비롯한 가족들은 성도들 앞에 언제나 환한 얼굴을 보여 주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갔다. 그렇게 3개월이란 짧은 세월을 보낸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그 모질고도 아픈 고통의 줄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어찌 갈 수 있으랴.

어찌 헤어질 수 있으랴.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는 묵묵히 소리 없이 주어진 그 길을 가고야 말았다.

 

오랜 시간 교회생활을 해왔던 나는 그동안 참으로 헤어지기 어려웠고, 가족들에게 큰 슬픔을 안기우고 떠나갔던 몇몇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주마등처럼 그 당시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나의 아픈 기억을 떠 올리게 되었다.

남겨진 두 아들은 7살, 5살이란다.

5살짜리 어린 아이는 어머니 품에 안기워 잠이 들어 있었고, 7살 큰 아이도 덤덤하게 지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아이의 모습에서 나의 어렸을 적 그 모습이 강하게 오버랩 되어 왔던 것이다.

 

아버지의 운구행렬이 지나갈 때 철 모르고 운구 앞을 달려나가니 동네 어르신들이 앞으로 가면 안된다고 하며 뒤로 보내던 기억도 있다. 아버지를 담은 관이 땅속에 묻힐 때에도 무엇인지를 몰랐던 나였다.

그리고는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의 정이 더해 가기만 하고 오죽하면 꿈에서라도 아버지를 만나보았으면 할 정도로 아버지를 그리워 하고 있는지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버지와 못다 한 그 父情의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나는 20살 넘어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이 더욱 내 안에 깊이 자리할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버지를 보내야만 하는 그 어린 두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해야만 하는 父情의 아픔을 짐작하려니 새삼 눈물이 앞을 가리울 뿐이다.

 

 


- 해처럼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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