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연습
내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사진 찍는 거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수줍은 총각이
여인네 앞에 선 것처럼 온몸이 굳어지니 말이다.
웃어보라고 해서 '김치' '치즈' 다 해봐도 사진 나온 거 보면 언제나 굳은 표정이요,
억지로 웃은 근심덩어리 얼굴만 보이니 말이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몸 자체가 경직되어 있는 것 같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이지만, 수많은 외침(外侵)과
어려운 삶을 살아오면서 근심과 불안 속에 살아오느라 제대로 한번 웃으며
살아볼 날이 없었던 터라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과는 거리가 먼 것만 같다.
그래도 요즈음은 살기가 좋아지고 많이 편해진 탓인지 젊은이들을 보면 참으로
활기 발랄하다. 그것은 노년기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삶의 질이
나아지고 장수도 하면서 더 바랄 것이 없는 요즈음 노인네들은 어찌 죽어야 편하게
잘 죽을 지를 생각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어찌 편하지 않으랴.
그래도 몇 십 년 살아오며 몸에 배인 굳은 표정은 쉽게 바꿀 수 없나보다.
사진 찍을 때마다 “좀 활짝 웃어보세요!”, “김치!” “치즈!” 등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저께 방금 돌아가신 한 분의 얼굴을 보았다. 참 평화롭다.
그 분을 향해 어느 누가 웃어보라고 하지 않아도, 왜 그렇게 얼굴이 우거지상이냐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다시 또 하나 배웠다. 죽은 사람에게는 근심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번뇌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근심덩어리를 없애겠다며 목숨을 끊는가보다.
그리고 근심덩어리라고 하는 그것은 근심덩어리가 아닌 아직은 살아있다는 증표가
되어 준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 한 무리가 있다. 웃는 사람들 말이다. 많이 웃어주면 질병이 치료된다며
시도 때도 없이 미친 사람들처럼 웃어주는 사람들.
한때 그 이야기를 듣고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실없는 사람 같아 보이고
머쓱하니 잘 되지 않아 때려 치웠다.
"웃는 얼굴에 침뱉으랴"라는 말이 있다. 성을 내고 싸울 때 얼굴 붉히고
아우성치는 것이요, 더럽다고 생각할 때, 구역질이 날 때에 침을 뱉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창자 속의 가래까지 끌어올려 침을 뱉어 준다.
웃는 얼굴의 의미는 친절이요 상냥함이다.
젊었을 때 한 달 정도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들의 친절함과 상냥함은
세계 어느 민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들 속은 어떠할지라도
일단 친절함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껌뻑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삭삭거리며 친절을 베푸는 게 상대에게 한 수
꿀리고 들어가는 거라며 목을 꼿꼿이 세우고 산다. 모든 곡식들이나 과일들은
익어갈수록 고개 숙이고 아래로 내려오는 것인데 말이다.
목에 힘이 들어가면 얼굴이 굳어진다. 얼굴 뿐 아니라 목소리도 굳어져서
부드러운 말이 나오지를 못한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요즈음은 카메라 앞에 설 때에 웃어보려고 애를 쓴다.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웃어주는 것도, 친절하여 겸손한 것도 연습을 하면서 배워줘야 하나보다.
어느 여성 분이 들려준 이야기인데,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었다.
단체로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카메라맨이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 이제 사진 박습니다.”하자 그 분이 대답하기를 “세게 박아 주세요.” 해서
그 자리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었다고 한다.
필자는 일주일에 몇 번씩 탁구를 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권면하거나 말을 한다.
“모든 운동은 다 심각하게 하는 데 탁구만큼은 웃으며 하는 최고의 운동.”이라고.
웃는 시간만큼은 모든 염려 근심 다 사라진다. 웃어주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으나
그러지 아니하더라도 매사 긍정적으로 웃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해 보고자 한다.
또한 어느 날 어느 시에 갑자기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있을 줄 모르니,
죽은 후에 내 상이 우거지상이 되어 있지 않도록 바지런히 온유함과 겸손함을,
그리고 웃는 연습을 해둬야겠다.
해처럼달처럼-차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