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2라는 숫자와의 인연 만들기

해처럼달처럼 2018. 7. 13. 13:46



아래 유튜브 복음송을 클릭하여 들으면서 글을 보면 좋을 듯 합니다.




22라는 숫자와의 인연 만들기



미국에 와 살기 시작한 것이 벌써 22년이 되었다.

세월이 그리 많이 흐른 것 같지 않은 데 벌써 22년이 지났으니 세월이란 것이 정말 화살처럼 빠르긴

빠른가 보다. 그 때가 40대 초반이었는데 지금 60중반을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가 나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겠다. 이곳에서의 22년이란 세월을 말이다. 아무 것도 한 것 없다. 하고 있는 것도 없고...,

변변한 일자리 하나 가져본 적도 없고, 비지니스라는 것은 꿈도 못 꿔 봤다.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뭐 하나 해 놓은 것이 없으니 이거 정말 기가 찰 일이다.

22년 동안 미국 살면서 영어 한마디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온 것인지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비통해 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 같다.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꿈은 사라지고 시들어지고 오히려 자꾸만 퇴보되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녀에게도 미안하고, 가족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이웃이나 하나님 보기에도 죄스럽기만 한 마음이니 이같은 자괴감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나.

오늘 문득 22라는 숫자를 떠올리며 혹여나 앞으로 내가 ‘22년을 더 살아갈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22라는 숫자를 생각하며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나 ‘22년을 더 살게 된다면이라는 생각에 초점을 두고 그 22년을 무엇을 하며 살아가면서

생각 없이 지나온 세월을 만회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하릴없이 지나온 22, 그러나 그 22라는 숫자를 나의 어떠한 인연으로 만들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다.

내가 처음 교회 나갔을 때가 22살이었다. 태어나 22년 동안은 교회라는 것에,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다가 교회에 발걸음을 하게 되었고, 첫날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안에 살게 되었고,

어찌 어찌 하여 목사가 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 온 후 또 다시 22년이란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세 번의 22라고 하는 숫자를 더한 66세가 되는 것이 1년 남았다.


뭣 모르고 살아왔던 22,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22년 여 만에 미국으로 건너오고, 22년을 또

보낸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22년만 더 살아보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주어질 그 22년이란

세월을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만이 나름대로 후회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하며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난해 모 권사님이 22라는 숫자에 관심이 있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남편이 유난히 좋아했던 숫자였다며 그래서 22라는 숫자를 관심 있게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나의 자동차 번호 끝자리 두 자리가 22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며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앞으로 내가 22년을 더 산다면 80중반을 넘긴 나이가 될 것이다. 요즈음 많은 어르신들이 쉬이

80을 넘겨 사는 것을 보니 그 정도 수명은 가지 않을까 싶다. 특별한 사고나 질병이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렇게 애써 22라는 숫자에 관심을 갖는 것은 거기에 어떤 인연이라든지 미련 같은 것을 두고자 함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날을 더 보람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다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이다. 그러면

도합 4번의 22라는 숫자를 지나게 된다. 그것을 사계절로 친다면 이제 막바지 겨울을 지나게 되는 셈이다.


겨울이니 몸조심도 더 해야 할 것이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도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때로는 태산처럼 쌓이는 눈도 맞아야 하고 예상치 못햇던 독감도 주의해야 한다. 사방이 꽁꽁 얼어붙은

길도 아장아장 조심스러이 걸어가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어디로부터 불어올지

모른다. 이러한 찬 겨울밤에 움츠리고 들어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따뜻한 아랫목을 만들기 위해 군불을

때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처럼 피곤한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찾아와 호호 언 발을 녹이며

하룻밤을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따스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삶이기를 바란다.


해처럼달처럼/차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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