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저는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감명있게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나도 어떻게 하면 예수처럼 살 수 있을까?'라고 자신의 신앙에 도전되어 보기도 했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숙제이며 또 동시에 염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이러한 염려는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후회할 것이 없는 근심이 되기 때문입니다(고후 7:10).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토록 염려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만큼 살지 못하기에 더욱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
얼마전에 제게 한 형제가 찾아 왔었습니다. 이미 그 이전 몇달 전에 처음에 만났던 그 형제는 지방에서 올라와 오갈 데 없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직장을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정직한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니까(시 15:1∼2, 84:11, 잠 12:22)-그 염려는 직장보다도 어쩌면 그와의 관계가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외적으로 나타난 지나온 환경과 사람됨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친구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재활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으로부터 한번 감사하다고 하는 전화를 받고는 곧장 그 일을 잊어 버렸습니다. 아니 잊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몇달만에 전화가 와서 다짜고짜로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염려하며 그를 만났습니다. 날씨도 매우 추운 날이었습니다. 그는 두터운 옷도 입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다시 저에게 당장 있을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마침 그날이 수요일이어서 그러면 저녁에 교회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이 얼마전에 시골서 올라온 한 청년을 모 신문사에 소개시켜 준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문사에 근무하면 숙식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큰 기대를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수요저녁예배에 갔더니 그 형제도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신문사에 연락 후 자리가 없다고 말하자 그 친구는 크게 낙담하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는 당장 갈 곳이 없고 쉴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지내기도 어려운 입장이었습니다.
이 때 교회에 나온지 몇달 안되는 한 청년이 자기 집에서 며칠 쉬게 해보면 어떠냐고 묻길래 그 집 형편을 잘 아는 저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만류했으나 그 청년은 집에 전화를 걸더니 허락을 받고 함께 그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또 돌아오고 나서 혼자 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까?
'유리하는 자가 있으면 네 집에 들이고 헐벗은 자가 있으면 입혀 주고 굶주린 자가 있으면 먹여 주라'(마 25:31∼40)고 했기 때문에 저는 또 다른 고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문득 목사가 되어 입술로만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떠들어 대는, 먼저 주님께 심판받아야 될 존재(약 3:1)임을 느끼며 후회(회개)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단칸방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청년을 며칠이고 묵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곧 단칸방이라고 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주님이 내게 오셔서 내가 너희 집에서 쉬기를 원한다고 하시면 단칸방이라도 기쁘게 내어 드렸을 것이고 제가 덮고 자는 두터운 이불도 내어 드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이라도, 아니 영원토록이라도 머무르게 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교회 다닌지 얼마 안되는 청년보다도 작은 자<그 청년은 작은 자의 의미도 잘 모름>를 대하지 못함을 알고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년초에 모 선교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마지막날 밤 캠프 화이어(camp fire) 시간에 형제 자매들이 서로 악수하며 안으며 하는 말이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였습니다. 물론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Agape)을 의미하는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굳이 '주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을 해야만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는 아직도 두가지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는 단순하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못하고 아직도 우리 뇌리속에 세속적인 사랑의 의미를 부여 받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가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의미는 그 차원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나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입으로는 너무도 쉽게 '주님의 이름으로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형제의 자그마한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쉽게 상대방을 평가절하하는 모순된 신앙의 삶에 젖어 있음을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주님의 충만한 사랑속에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들이 때로는 힘이 되어지고 또 낙담케 하는가를 안다면 우리의 언행심사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도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사랑의 표현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더 깊어지거나 또는 가치가 있다던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이와 같은 성경구절을 나열하려면 어찌 다 하겠습니까?
다만 한가지 지금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그 때 그 청년에게 좀더 못해 준 후회와 [참된 제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저에게 이전보다 더 강하게 도전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