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Message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십시오

해처럼달처럼 2015. 3. 29. 11:35

다 이루었도다

 

53:4-6

1.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2.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깎는 앞에 잠잠한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보게 되며 날은 것이요 그의 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9:28-30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포도주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포도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 입에 대니 예수께서  포도주 받으신 가라사대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혼이 돌아가시니라

6.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다 이루었다!

 

 

독일의 다카우라고 하는 곳은 독일 사람들이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가 있는 곳이라 합니다. 악명 높았던 유대인 수용소가 있던 곳입니다. 아우슈비츠가 가장 유명한 곳이고, 다카우가 두번째인데, 다카우에서만 10년 동안 20만 명이 살해되었느데, 그 중 3/1이 유대인이라 합니다. 주로 가스실에 몰아넣고 죽였습니다. 그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지방을 추출해서 비누로 만들어 군대에 보급했습니다. 지금도 기념관에 인체로 만든 비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신에서 금이빨을 뽑아 금괴도 만들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유태인을 너무도 싫어합니다. 오죽하면 뱀과는 같이 자도 유태인과는 같이 못 자겠다고 하겠습니까? 히틀러는 이런 반 감정을 이용해 유태인을 무려 600만을 살해했습니다. 사실 히틀러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유럽인들이 공모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유태인들을 미워한 걸까요? 유럽인들의 반 유대정서의 뿌리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유대인입니까? 빌라도입니까? 가룟 유다입니까? 현장에서 주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입니까? 주범이 누구입니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분은 하나님입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나님이 완벽하게 그렇게 하신 겁니다. 로마서 5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약속대로 계획대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 28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경을 응하게 하신 분입니다. 자기의 뜻을 주관하며 이루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인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고, 그 약속을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신 겁니다. 병정이 해융에 젖은 포도주를 갖다 입에 대어 주었지만 마시지 않았습니다.

 

에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각본대로 죽으신 겁니다. 본문도 그렇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보통 사람이 죽을 때 숨이 먼저 떨어집니까? 고개가 먼저 떨어집니까? 죽으면 자동적으로 고개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주님은 아무런 채비도 없이 죽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각본대로 죽었다는 겁니다.

에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어느 누가 죽이려 하거나 해를 입히려 해도 죽는 분이 아니고, 해를 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음을 허용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간이 되니 주님이 고개를 숙였고, 하나님이 숨통을 끊은 겁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는데, 그 좀전에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면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마지막에는 <다 망했다, 다 실패했다>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유사 이래 가장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분이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까? 십자가 사건을 연출하신 하나님의 뜻, 각본, 계획, 비밀을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 인간 구속의 프로젝트를 다 성취하셨다는 겁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도 어쨌든 이러한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가룟 유다의 배신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로 막판에 실패한 사건으로 끝난 게 아니라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관철한 인간 구원의 대서사시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대체 뭐 길래 인간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사실 주님이 거기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구원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한 사형방법 중 가장 잔인한 사형대였습니다. 왜 십자가형이 무섭습니까? 절대 빨리 죽는 걸 허용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천천히 조금씩 죽게 만든 형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창으로 찔러 빨리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루나 이틀, 건강한 사람은 사흘이나 달려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전지전능하시다는 하나님이 어째서 십자가라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베드로전서 1 12절을 보면,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고 합니다. 워낙 이 방법이 기상천외해서 하늘의 천사들도 좀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으며, 왜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야만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고유한 품성인 속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첫째가 공의입니다. 절대적으로 공평하고 의로우신 성질입니다.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이 속성 때문에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관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절대 죄를 간과하실 수 없습니다. 바로 이 공의라는 속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죄에 상당한 벌을, 선을 행하면 거기에 상당한 상을 주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범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모든 인생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운명적으로 유전적으로 원죄를 뒤집어쓰고 때어납니다. 원죄를 갖고 태어나기에 우리는 자범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원죄와 자범죄의 관계가 이토록 운명적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생아 다 죄인이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공의 외에 사랑의 속성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공의만큼이나 절대적인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돌려대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는 겁니다.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의와 사랑은 이질적입니다. 대립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은 아예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공의를 내세워 모든 죄인을 심판하시려니 사랑이라는 속성에 걸립니다. 사랑을 내세우니 공의에 걸립니다. 이게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제3의 속성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지혜입니다. 여기서 십자가가 착상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관철되는 십자가라는 해법이 나왔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셨다는 말씀은 공의도 사랑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으로 저주 받아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공의를 관철하신 겁니다. 주님 한 분을 저주하고 버리심으로 우리를 다 살리셨습니다. 사랑을 관철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는 말씀도 맞습니다. 우리 죄를 응징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맞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다 관철하셨습니다. 주님 한 분을 심판하여 우리를 살렸으니 사랑을 관철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칼 같은 공의와 한없는 사랑이 성취된 겁니다. 얼핏 보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지혜가 착상한 위대한 인간 구속의 드라마입니다

 

이 대 구원의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된 바요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주신 소망이요 약속이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한 일은 없지만, 이 하나님의 창세기로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을 상기시켜 주시고 끊임없이 반포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신 이 사실 때문에 바울이 고백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 나는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다, 나는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다짐과 고백입니다. 십자가만을 알고 전합시다. 종려주일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십시다. 십자가 가까이 다가가십시다. 십자가의 은혜와 은총이 여러분께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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