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신문 칼럼

유다 이스카리옷과 현대 기독교-김소연

해처럼달처럼 2019. 6. 15. 04:18


유다 이스카리옷과 현대 기독교

(Judas iscariot and Modern Christianity)

 

위의 타이틀은 크리스천 매거진 ‘Midnight Call' 20192월호 표지기사에 실린 것을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Our Lord's betrayer is a symbol of both the anti-christian Israel of the end times, and a christianity that is becoming more and more anti-christian."

 

우리 주님의 배신자는 종말에 크리스천을 대적하는 이스라엘과 기독교가 점점 더 크리스천을 대적하는 두 현상의 상징이다. --라는 주제와 함께 Norberth Leith가 쓴 내용을 여기 번역 소개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크리스천 이름(성경등장 인물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유다라는 그 이름만은 원하지 않는다.

유다 이스카리옷이란 이 이름은 은 삼십냥과 입맞춤으로 자기 스승(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흔히 유다의 입맞춤이라고 유행어가 된 그 이름 말이다.(26:14-16, 14:10-11, 22:-3-6)

유다(Judas)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예후다’(Yehuda; Judah)이며, 신약 성서시대에는 평범하게 잘 알려진 보편적인 이름이다. 유다의 별명인 이스카리옷은 유다가 살다 온 그 고장의 이름으로써 City of Kiriath 혹은 Kerioth(15:15)에 등장하는 키럇세벨(kirjath Sepher)이 되기 전의 드빌(Debir)이다.

열두 제자 중 유다는 갈릴리로부터 온 제자들과 달리 유일하게 유대(Judean)로부터 온 자이다. 유다의 생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6:64) 그는 하나님의 자비, 예수님의 사랑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깝게 어울려 지냈지만 그는 탐욕스러운 도둑이었다.(12:6)

그의 열심의 동기는 부패한 자아, 자기 발현에 기인한 예수님의 동기와 뜻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세상(The World), 마귀(The Devil)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각, 계획을 주님이신 예수님 보다 더 우위에 둔 자아숭배, 의지 숭배자였다.(13:2)

유다는 자기의 주도권으로 로마 제국과 맞서려는 의도까지 보인 자이다. 무엇인가를 획득하고 성취하겠다는 야욕으로 들떠 있었던 인물이다. 당연히 그는 하나님 방법에 동의할 수 없었고 또한 구원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진실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불리어졌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셨고, 아신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다.(6:70, 13:2, 27, 17:12)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 진다고 해서 참으로 그리스도인인가?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대로, 거듭나지 않은 채,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채 열심히 교회 다닙니다.”라고 공언하는 교회의 교인들을 진정 그리스도인이라고 성경은, 주님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서 다루어지고 있는 멸망의 아들(Son of perdition; 17:12)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거절하며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이스라엘(유대인)의 모습과 종말에 처한 이스라엘의 그 정해진 때에 등장할 멸망의 아들로서의 그 적그리스도이다.(살후 2:3, 5:43)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이스라엘을 간추리실 때(The time of Jacob's trouble; '야곱의 고난의 때‘; 30:7) 등장할 그 적그리스도의 영이,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한 그 적그리스도의 영(요일 4:1-3)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그토록 열망했던 적그리스도의 영(7:1, 13)을 가진 자들, 이스카리옷 유다는 그러한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동시에 그는 교회 안에서 주일예배, 수요기도모임, 금요찬양예배 등을 빠지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출석하며 공적을 쌓고 있는 교회의 관객들과 등록 회원들로써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진실로 하나님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참 사랑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마지막 때 라오디게아 교회를 대표하는 제도교회 회원들, 예수님을 문밖으로 쫓아내고 사람이 주인이 된 명분뿐인 죽은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역사적으로도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배척하고 증오하고 불살라 죽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읽고 또 읽는 참된 그 성경책도 불살라 버렸던, 그 영의 후예들인 것이다.

Norbert는 이 부분에서 힘주어 말한다.

"Is everyone who is called a christian, Really a Christian?"

이스카리옷 유다, 그는 <He also stand for a tendenoy toward anti christian... Churchianity>라고....

 

어느 교회의 등록교인이라고 해서 그가 진실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듯이, 어느 제도 교회에 등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하늘나라 하나님의 어린 양의 생명록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즉 그가 크리스천이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교회 건물이나 조직이 교회가 아니라 거듭난 크리스천은 거듭나는 순간 자기 안으로 들어와 계신 성령 하나님의 전이 된 것이다.(고전 3:16, 6:19-20, 8:9-11)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그분의 몸의 일부, 지체가 된 것이다. 교리 상으로도 그러하고 실제 명분도 그러하다.

 

Anti Christian-Churchianity, 그리스도인을 대적 핍박하는 기독교라고? 어찌하여 여기까지 떠내려 왔단 말인가?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참된 기독교인을 대적하는 교회 회원’(church-goer)들의 실상! 이에 대해서는 2천 년 전 사도 바울이 이미 갈라디아서를 통해 분명한 정의를 내려놓았다.(5:22-29;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하였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하도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2천 년 전에 언급한 그 당시에 몇 천 년 전의 아브라함 시대를 비교하며 지금도그러하도다 했다면, 지금 오늘 이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옴을 보고 있는 우리는, 긴박한 상황의 이 시간을 응시해야 할 때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고 하시니라(6:70). 유다는 참 제자에 속한 사도가 아니었다.(6:64)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주여라고 다른 제자들처럼 부르지 않았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는 그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다. , 그 예수, 나사렛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인지하고 불렀던 것이다.

그 당시 십자가에 못박힌 그가 예수”,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강도는 그 예수를 자기의 주님으로 아멘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다.(2:28-29) 그리고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다 기독교인, 참된 칭의가 이루어진 기독교인에 속한 것이 아니다.(딤후 3:5)

 

마귀는 이미 온 세상을 자기 손안에 틀어쥐고 있다. 이 권세를 그는 하나님의 허용작정에 의해 건네받았다. 그 마귀는 잠시 잠깐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욥기 참조) 그러나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해진 시간의 무대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분명히 어느 날,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고전 15:26, 21:13-15) 그래서 그는 이 세상 안에서 엄청난 힘으로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12:12)

결국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로마와 결탁했듯이, 이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인을 반대하는 유대주의와 그리스도인을 반대하는 세상과 함께 손을 잡고 일할 것이다.

Anti Semitism(반유대주의)에서 Anti Christian(반기독교주의)가 눈에 보이는 제도 교회 안에서 주최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말세의 배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예수님을 에워쌌듯이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자들의 목표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참된 제자들, 사도들을 둘러싸는 마지막 전쟁이 남아 있다.(12:17, 13:7, 19:19)

지금도 예언학자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Countdown된 시간을 응시한다. 그들은 지난 20181월 이후 멸망의 날 시계는 12시 정각에서 2분 정도 남아있다고 본다. 우리는 시간을 정해서도 안되고 날짜를 정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 바로 그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마지막 날’(The Last Day; 단수)을 주목해야 한다. 요한복음 6:39, 40, 44, 54절의 마지막 날이 얼마나 가까웠는가를 정하신 분만이 카운트하고 계신다.

 

참으로 인류는 잘 나가고있다.(13:30) 참으로 인간들은 그의 길(사람의 길) 안에서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사람의 정해진 배도의 깊은 밤을 대단한 위력으로 달리고 있다. 온 세상은 특히 공식적인 서구 교회의 조직은 공공연히 그리스도인을 제거시킬 준비가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이는 그들이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니이다.”(17:8-9) 그리고 계속 기도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17:14, 16, 17)

이 땅은, 이 사회와 나라들은 당연히 정사와 권세와 어두음의 주관자인 세상의 영향아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악한 자의 영적 권세(6:12-13)에 교회가 눌려 예수 Jesus, 그 이름, 참된 기독교, 그리고 공인된 성경, 하나님의 말씀의 책의 가르침은 이미 배반당했고, 버려졌다.

성경적 진리는 거짓말이 되어 버렸고, 거짓이 진리로 둔갑하였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존재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을 변개시켰다. 제도 교회들의 조직 횡포가 적그리스도의 영임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조직이 한 사람의 신자를 핍박해온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배가 가라앉기 전에 구명보트로 옮겨가야 한다. 우리는 지금 보트를 놓쳤다. 돌아갈 곳이 없다. 2015년 이후 영국내의 학교는 세상의 근본은 진화론에 준거하고 있다.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 외에 아무 것도 가르쳐서는 안된다. 20184‘The Hourglass Festival'이 이란에서 거행되었다. 의도적인 상징으로 유대인의 나라, 그 땅에서 시작했다.

Mahdai Qomi 페스티벌 총책임자의 비서는 말한다.

이스라엘을 파괴하기 위한 축하연이 거론되고 있는 이 조직은 유럽 내의 2400 Anti Israel NGO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남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 동아시아가 획기적인 선전에 선두 주자가 되어 이 페스티벌은 전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돌고 있다고 선포했다. Qomi는 이 페스티벌은 76일까지 이어지며, 모든 이란인들과(모슬렘) 외국 예술가들에게 제안하고 있는바, ‘Down with Israel'이라는 주제 위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많은 시간과 투자를 아끼자 말라, 열매가 있을 것이라며 손짓하고 있다.

 

Judge Jens Gnisa's Book <Das Erde der Gerechtigkeit; The End of Justice>이 기술하는바, 최근 주동이 되고 있는 카톨릭의 비숍 Carsten Rentzig는 크리스천-이슬람의 대화는 유익하고 좋은 것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선전한다.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 자체는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Christopher Street Day'는 독일과 스위쯔랜드의 자랑스러운 게이, 게이들의 자존심퍼레이드로 여흥 분위기이다. 교황 프란시스는 선포했다. “성경과 코란 사이에 다른 점이란 전혀 없다...

멸망 직전의 이 시대가 최후의 모습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무관하다 치고, 교회 안의 사람들, 기독교인들의 노출된 반응이다. 모든 미디어(뉴스, 잡지, 우락, 영화, 예술, 스포츠 등)들은 인간의 배신, 불안정, 사악함, 인간성 상실, 불신, 배반, 잔인함을 드러내며 선전하는 이 모든 세상 것들에게 눌려버려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몰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포기한 것이 아니라 동조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개성인가? 크리스천의 정체성, 우리의 신원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을 증오하는 이 추진세력과 자극에 동조하며 장려할 것인가?

반쪽자리 제자도’ ‘신학자 연맹들’, 학위에 깃발을 꽂고 강단을 더럽히는 기만과 거짓과 탐욕과 왜곡된 위조, 허위신고 고발 등을 거짓 관용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 열둘 중의 하나의 이름, 유다가 그리스도인을 적대하는 교회 출석 회원들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유다의 배신은 로마를 위해사랑 아닌 증오를 택한 셈이다. 주예수를 배반하기 이전에 그는 로마의 구원을 등한시 한 것이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그 로마군병들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친 자기 종족의 유대인들을 위해서도 우리 주님은 십자가로 가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세상을 향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최상의 무기는 그래도 여전히 복음과 사랑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1)

우리 주님은 우리 귀에 남겨 두셨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2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