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Message

숨겨진 대로(大路)

해처럼달처럼 2009. 5. 14. 10:08


출애굽기 14장 10절 이하 말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신묘막측한 일을 아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섭리와 그 뜻을 다 헤아려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이기실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비신자들도 십계명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문제를 영어로 “Proble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 말에서 유래된 말로써 “진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길과 나의 하고자 하는 일들을 가로막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문제를 갖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항상 문제와 더불어 씨름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문제가 있고, 가정에는 가정의 문제, 사회는 사회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어디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문제는 항상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이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수용할 수 있는,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문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산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늑대나 곰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크리스천에게도 어려움은 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은 온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도 받고, 하는 일들마다 다 잘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교회에 나와 예수님도 믿고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어떨 때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안될 때가 많아서 전도하는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곳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온전한 사람과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그러한 문제를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야고보와 베드로는 너희가 시험당할 때에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고 또 감당치 못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이 다른 이유입니다.
기뻐할 줄 안다는 것,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과 시험이 닥쳐오면 불평을 하고 상대를 욕하고 환경을 탓하게 되지 기뻐할 줄을 모릅니다.

본문의 믿음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애굽에 죽을 때가 없고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로 이 홍해바다에 매장하려느냐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광야길에서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먹을 음식이 없다고 애굽에서는 그래도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이것저것을 먹지 않았느냐고 불평을 토로합니다.  술먹지 마라, 담배먹지 말라, 뭐 이것 저것 하지 말라 먹지 말라라는 것이 너무 많아서 교회가고 싶어도 못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한 사람은 교회나오라고 하면 좀 더 있다가 나가지요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군대의 추격을 받으면서 진퇴양난에 빠진 가운데 보여주고 있는 것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 외쳐대는 아주 극단적인 예이기도 한 것입니다.

항상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두 부류로 나뉘이게 됩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에 편한 쪽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손해 안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은 어떡하든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더욱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불평하고 원망하며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교회에 다니며 청년들이나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를 제대로 믿을려면 먼저 손해보는 것부터 배워라.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려며는 먼저 양보하는 것부터 배워라, 그리고 항상 겸손하고 부지런하라 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가르칩니까? 아니 왜 손해보고 양보하라고 합니까? 이 험한 세상에 악착같이 살아도 힘이 든데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분명한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손해보는 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다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한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 관원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근심하며 떠나 갔습니다. 그러나 세리장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어떠했습니까? 자기의 것을 이웃에게 도로 돌려주는 4배씩이나 갚겠다고 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로 본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힘이 세고 지혜와 지식이 있고 돈과 권력이 있어도 그것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건강하다고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졌다고 가졌다고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건강과 생명'이란 월간 잡지를 만들어 주로 병원에 선교를 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오늘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는가  하면 암으로 세상을 뜨고, 또 사업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고 뜻하지 않은 사고 등으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고, 아마 여러분들도 주위에서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는 뜻하지 않은 사고와 질병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그밖의 여러 환경들이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계를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계에 이를 때 실망하고 좌절하고 때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계를 느낄 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해야 되지만 한계에 부닥칠 때가 곧 찬스요 기회임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험에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한 개인 개인에게 당신의 뜻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원대합니다. 위대합니다. 너무나 신묘막측하여 우리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기껏 안다고 하는 것은 지나놓고 나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위하여 더욱 기도해야만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싸인이구나 하며 문제를 수용할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 와서 다니다 보니 주로 흑인들이 많이 보입디다.  덜 까만 사람도 있지만 새까만 사람들이 많더군요.  혼자 생각하기를 깜둥이들은 깜깜한 지옥에 가도 표시가 하나도 나지 않고 좋겠구나 그리고 반대로 새까만 흑인들이 햇빛보다 더 밝은 천국에 가면 반대로 표시가  더 잘 나겠구나 생각하며 혼자 웃었습니다.
한가지 좋은 것은 사람들이 외모에 신경을 안써서 좋은 것 같아요. 뚱뚱하든 홀쭉하든 적든 크든 제멋대로 하고 다니니 얼마나 편하겠어요. 한마디로 생긴대로 사는거지요.
특히 한국에 사는 대머리 분들이 와서 살면 좋겠더라구요. 머리에 털이 없어서 옆에 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더 가운데로 보낼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면 참 안됐어요.  여기 가운데 머리가 없는 사람들을 속알머리 없는 사람, 가장자리에 없는 사람은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여기 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냥 빡빡 밀고 다니니 대머리인 분들이 보면 그래도 위로를 받을 겁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 안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퇴양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빠져나갈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이 없어도 하나님은 길을 만들어서라도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들에게는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보십시오.
“너희가 오늘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고 모세는 외치고 있습니다.  홍해보다도 더 위대하시고 애굽군대보다도 더 강하시고, 문제해결의  키를 갖고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모세는 외치고 있습니다.  바다속 보이지 아니하는 그 깊은 속에 하나님이 큰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고 있는 모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출렁거리던 거센 바다물이 갈라집니다. 거기에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 그 길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들어가는 그들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이민생활속에서의 숱한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때 그때마다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 어느 누구의 손길을 통해서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해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살아왔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전적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어느날 하나님이 찾아오시더니 100세에 낳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없이 순종합니다. 왜 그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주시지나 말지 주셔놓고는 도로 달라니 기가 막히지요. 아브람과 이삭이 모리아산으로 올라 갑니다. 그런데 이삭이 보니 땔감과 불은 있는데 제물이 없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람은 기가막힐 지경이지요. 

물론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받기 까지 그는 수많은 난관과 시험을 거치며 자기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게 되었다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 이삭에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라고요.
큰일났습니다. 예? 누가 큰일났느냐구요?
하나님입니다. 아니 아브람이  하는 말이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실 거라 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바빠졌어요. 아니 저놈 봐라 이삭을 바치랬더니 뭐 하나님이 준비할 거라구? 그 극한 상황속에서 아브람의 그 말 한마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은 양을 지나가게 하다가 덤불에 걸리게 하고 그것을 잡아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없는 것을 있게도 하시고, 있는 것을 없게도 하시고, 죽은자도 다시 살리실 줄 믿는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힘들어도 순간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 어렵지 않겠어요. 한계가 있는 사람이고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그래도 그때 그때마다 우리를 위하여 묵묵히 끌려가셔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며 참고 또 참으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브람에게 양을 준비해 주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바다 속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길, 숨겨진 대로를 준비해 놓으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일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안되는 일이 있습니까?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인생의 문제는 이 땅에 편만해 있어도 그 문제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눈을 뜨십시오. 깨어 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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