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Message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해처럼달처럼 2009. 4. 19. 10:46

“와서 아침을 들어라”

 

요한복음 21장 1-13

 

배경설명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이에 실망한 제자들이 다시금 각자 고향인 갈릴리에 돌아가 마음은 심란하고 무료하여 배를 띄우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다시금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으나 날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해안에서 한 사람이 "잡은 고기가 있느냐?" 물으니 "한 마리도 없다" 하니 그 사람 하는 말 "그러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봐라" 해서 던졌더니 고기가 심히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라...
이에 한 제자가 분명히 주시다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이용해 그물을 끌고 와서 세어보니 큰 고기가 153마리를 잡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까지의 말씀을 다시한번 정리해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로마 나라에서 해방되어 왕이 되면 함께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실망한 가운데 다시금 옛 생활로 돌아갈려고 하는 시점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다시금 부르시고 은혜를 주시며 사명을 새롭게 해 주시는 장면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우린 누구나 다 이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좇아다니다가, 또 누군가와 함께 동업자가 되어 일을 할려다가, 또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그것들이 깨져버릴 때 맛보아야 하는 아픔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과 아픔, 정신적 충격은 받아본 사람 외에는 이해못할 커다란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한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젊은 여인이 남편을 잃고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강물에 뛰어들어 남편을 뒤따라간 사건을 보며, 제가 사람들 있는 데 그랬습니다. “야! 요즘 세상에도 그런 여인이 있었다니” 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왜냐면 요즘처럼 이혼율이 높은 세상에서 남편을 뒤따라 숨진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자들의 형편과 모습이 그와같이 슬픔과 좌절과 낙망 속에 빠져 허탈한 마음을 안고 약 3년여만에 다시금 그물을 잡고 바닷가로 나가는 그 모습들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개중에 많은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3년간이나 헛고생한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원망하고 탓했을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 부르시고 택하신 자들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는 놀라운 사랑을 다시한번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찾아오셔서 실망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새롭게 부여해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받았던 그 첫사랑을 생각나게 하시고 다시금 용기를 주시는 사건이 오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을 부르시던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시몬의 배를 이용해 말씀을 전하시고, 그날 밤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그들의 배를 데리고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게 하시면서 얻은 제자들이 베드로 형제와 요한과 야고보 형제였습니다.
7절 말씀에 보면 그물에 고기를 잡았을 때에 한 제자가 이런 일은 바로 예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에게 저 분이 주가 아니냐 할 때에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바닷물로 뛰어들어 예수님께로 달려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베드로의 장면을 보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헤엄쳐 갔을까 아니면 물위로 뛰어갔을까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기에 생각만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베드로를 만나면 물어볼 것입니다.
해안가와 이들의 배가 떨어져 있는 거리가 오십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1간의 거리는 1m80cm입니다. 그러면 전체 거리는 90m입니다. 90m 거리이면 쉽게 사람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헤엄쳐 오기에도 쉽지 않은 거리입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겉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헤엄을 치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야 하는데 베드로는 오히려 헤엄치기에 거치장스러운 옷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물위로 뛰어들었다가 물결을 바라보고 바다속으로 빠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감히 누가 뭐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고 성경을 그리 해석하느냐고 말할지 모르나 감히 말하기는 베드로는 물위를 뛰어서 예수님께로 한걸음에 달려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흉용거리는 물결을 바라보았을 때는 무서워서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으나 지금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 어떤 환경도, 흉용거리는 물결도,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를 가로막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감히 부탁드리기는 세상 삶을 살아가다보면 더구나 이민의 힘든 삶을 살다보면 때때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절망과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누구를 바라보고 사십니까?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11절 말씀에 보면 고기가 그물에 가득 들었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하나님께서 그물을 찢어놓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다 헛것입니다. 말라기서 3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황충을 금해주셔서 토지 소산이 멸하지 않고 과실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셔야 되지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하시는 일들과 가정, 자녀들 모든 기도하시는 일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풍성하게 받으시는 축복이 있으시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모래위의 발자국이란 어느 무명인의 시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떠나있는 그곳에까지 찾아오셔서 다시금 부르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밤새 헛그물질 하느라 수고한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준비해 놓으시고 부르시며 와서 먹으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와서 아침을 들어라”

아침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뜻이 있는데, 거의 모두가 다 좋은 상징입니다.
먼저 새날 새 희망의 뜻이 있습니다. 어두운 날은 지나가고 괴로웠던 날도 지나가고 새롭게 시작하는 희망에 부푼 날이기도 합니다. 폭풍우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의 태양은 더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생을 비유할 때도 아침을 소년기, 점심을 중년기, 저녁을 노년기로 부르기도 합니다.
부유하고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달리 소년기가 좋은 사람도 있고,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중년기를 잘 보내는 사람도 있고, 인생의 관리를 잘 해서 노년기도 더 행복하게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민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만, 어렵게 세탁소, 그로서리 등에서 일하다보니 어느 정도 물질은 모으고 그 어간에 자녀들도 잘 성장시켜 놓기까지 하는데, 그만 중년 말년기에 들어서면서 너무나 고생한 나머지 중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소년기, 중년기, 말년기 셋 중에 어느 쪽이 좋아야 합니까?
다 좋으면 좋지만, 그게 쉽지는 않지요. 소년기에도 중년기에도 좀 고생은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노년기가 좋아야 합니다.
처음 행복보다는 나중 행복이 더 크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야 그 사람 젊어서 고생하고 노력하더니 저렇게 말년을 잘 보내는구나” 하지만, 소년기때 아무리 좋아도 말년에 나쁘면 사람들은 흉을 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좋은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시편기자도 126편에 말하기를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밤새 고생하여 지친 제자들을 위해 떡과 생선을 구워놓으시고 그들을 부르시고 함께 아침을 잡숫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엘샤다이'  '공급자'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침은 희망이요, 비젼이요, 축복입니다.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아침을 먹고 나가야 든든해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공부하러 학교가는 학생이 아침을 먹고가야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아침은 인생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첫 발걸음을 내딛는 아침에 기분 상한 일이 생기면 하루종일 개운치 않고 아침에 기분이 좋으면 조금 기분상한 일이 생겨도 하루를 잘 넘길 수가 있습니다.
 아침은 비젼입니다. 비젼과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 가면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사로 일생을 보낸 리빙스턴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상에 보면 목에는 망원경이 걸려 있고, 한손에는 총이 들려 있고, 한손에 성경이 들려 있다고 합니다. 목에 걸려 있는 망원경은 멀리 바라다보고자 하는 비젼을 의미하고, 총은 남을 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보호함이고, 성경은 삶과 사명을 일깨워주고 인도하는 지침서이기도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 2차 세계대전의 분주한 속에서도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루라도 성경을 읽지 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은혜를 주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뻐서 뭐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다. 15절 이후에 보면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라고 나옵니다.
조반 먹은 후에 베드로를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요 사명입니다.

지금도 교회밖에는 목자없이 헤매는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는 많지만 생명수는 말라서 굶주림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따뜻한 빵과 옷이라도 입혀줄 수 있는 영혼의 눈을 가지고 그들을 영원한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일을 많이 했거나 적게 했거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자에게 똑같은 상급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한 포도원 주인이 품군들과 약속하여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나가 일하게 합니다. 그들에게는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장터에 나가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라 내 너희들에게도 상당한 품삯을 줄테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더 늦은 시간에도 몇번을 나가면서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하게 한후 일을 마친 후에 제일 나중 온 자로부터 불러서 품삯을 주는데 한 데나리온 씩 주는지라 먼저 온 자들이 "야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일했으니 더 받겠구나" 했지만, 포도원주인은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을 알수 있듯이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은 똑같은 상급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한 분 한 분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여 교회 앞에도 하나님 앞에도 영광 돌리우고 상급 받으실 수 있기를 다시한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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