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알기

서재필 박사 기념 재단 및 기념 의료원

해처럼달처럼 2009. 5. 30. 11:54

오늘은 이곳 필라델피아에서 생활하셨던 서재필박사를 소개해 봅니다.

18세때 과거시험에 최연소 장원급제하고 겨우 20세 때인 1884년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미국으로 망명한 풍운의 인물…미 망명 당시가 24-5세 때이다.

서 선생은 갑신정변 실패후 3족이 몰살되는 아픔을 안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부모는 처형됐고 아내는 자살했으며 2살짜리 아들은 나라에서 굶겨 죽였다. 샌프란시스코에 함께 온 박영효와 서광범은 양반 체면에 막노동은 못하겠다며 돌아갔지만 서 선생은 막일을 하며 밤에 YMCA와 교회에서 영어를 배웠다.

독지가를 만나 동부로 건너온 그는 의대에 진학,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자 최초의 의학사(MD)가 된다. 갑오경장으로 고국에 개화의 바람이 불고 김홍집 내각은 서 선생에게 외무대신 자리를 권한다.

그러나 1895년 귀국한 그는 관직을 사양한채 "민중의 각성과 지지 없이 나라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한글전용인 최초의 민간 신문이었다. 당시 서재필이 주창한 '독립'은 무조건적인 외세배격이 아니라 청(淸)에의 종속에서 벗어나 균형적 외교를 통해 적극적 대외협력관계를 맺자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왕실과 갈등을 빚으면서 그는 2년 4개월만에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창간 당시 발행부수 300부에서 3000부로 성장한 독립신문은 윤치호가 인수했으나 1899년 폐간된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서 선생은 "독립활동을 위해선 안정적 재정이 필요하다"며 미국인 친구와 동업해 인쇄업을 시작한다. 사업은 종업원 50명 규모로 번창했고 서재필은 이를 재정적 바탕으로 삼아 제1차 한국의회 개최, 한국홍보국 설립, 월간지 '코리아 리뷰' 발행, 워싱턴군축회의 참석 등의 왕성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고국의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기고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한 해에 사나흘도 회사에 출근하기 힘들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달리고 당시 돈으로 8만 달러 이상의 사재를 털어넣는 바람에 사업은 거덜난다.

그는 62세때인 1926년 다시 의대(펜실베이니아대 의학부)에 진학해 병리학을 배워 고용의사 생활을 하다 72세에 병원을 개업했다. 광복 후 일시 귀국했다가 "통일된 조국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하며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전쟁 발발소식에 졸도를 했고 1951년 1월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곳엔 그 분의 뜻을 기리며 설립 운영되고 있는 서재필기념센터(주로 의료원으로 활동하면서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가 있으며 그 분이 살던 집을 구입, 기념관으로 보수하여 개방하고 있다.

 

 

 

 

        서재필 박사와 두번째사진은 그의 부인 뮤리엘, 세번째는 기념센터로 의료원과 봉사센터로

        동포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장소.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

 

 


 서재필 박사가 살던 집을 구입, 기념관으로 보수하여 개방하고 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그를 기념하여 기리는 비석과 워싱턴 D.C에는 그의 동상도 제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