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Understand

해처럼달처럼 2013. 7. 19. 01:23

 

 
“Understand” 

 

이제 곧 내 나이 60이 되어 온다.

그래도 그 정도면 나름 경험할 것은 다 경험하며 살아온 나이 아니던가.

그런데, 60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물론 삶이란 것이 죽기 직전에도 배울 바

없는 것이 아니겠으나, 그런 문제가 아닌 내 육체에 관한 일이니 이거 아둔해야 하다 할는지,

신경마디가 무뎌서 그렇다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내 발의 크기가 오른쪽 왼쪽 다르다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는 말이다.

예전부터 운동화를 사 신으면 이상하게도 한쪽이 늘 적게 느껴졌었지만, 한 번도 내 발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지 않고 운동화가 잘못 만들어져 나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소와 사자 둘이 사랑을 하게 되어 혼인을 했고,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풀이 싫었지만 참았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고기를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었고, 둘은 마주앉아 이야기 하며 결국엔 다투고 헤어지고 말았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다˝였다.

소와 사자의 사랑, 무엇이 문제였을까?

죽도록 사랑했던 그들이 왜 헤어지게 되었을까?

소는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보지 못하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는다는 말이다.

조금은 의미가 다른 말이지만, 나 역시도 나 위주로 생각했다는 같은 생각을 해본다.

나의 발이 잘못된 것일까 하고 진즉에 한 번만 생각했더라도 운동화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할까

하고 운동화 회사를 탓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아마, 내 발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나는 운동화를 살 때마다 작은 발에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라 큰 발에 맞추어서 샀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불평 또한 없었을 것이고....

세상에서 빚어지는 각종 많은 시비거리나 오해 등도 분명 이러한 문제점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영어로 쓰이는 ‘이해’라는 단어가 “understand"이다. 'under'와 ‘stand'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상대방 아래 한 발 내려가서 보면 상대방을 바로 볼 수가 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언성 높아지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다투는 일도

헤어지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무조건적인 ‘최선’은 어쩌면 ‘이해’와 ‘양보’라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선’을 하되 먼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던가. 부부간에도 잘못 긁어주면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구박 주기 일쑤 아니었던가.

 

옷을 사 입어도 몸에 맞아야 한다. 친구를 하나 사귀어도 내 마음에, 내 성격에 맞아야 한다.

모든 매사가 나 위주로 엮어져 있다. 그러지 않으면 불편하다. 우리는 그 자그마한 불편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옷이 조금 커도 작아도 삶에는 아무 문제없다. 한 어머니 태에서

나온 형제도 성격이 다르거든 하물며 남일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보는 그 모든 것들이 나의 관점에서 시작

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나고 보면 “아, 그 때 왜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던가.”하는

후회를 한 적이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화목한 가정 만들기, 화목한 사회 만들기, 화목한 나라 만들기, 불평 없고 다툼 없는 행복한

사회 만들기는 나의 관점에서부터 생각하고 보아 나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understand" 하여

그 사람을, 어떤 환경을, 사물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작금의 어두운 사회, 불신이 팽배한 마음들 모두가 다 내 생각 위주에서 시작된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자명해졌다.

밝은 내일이 보이는 듯도 하다. 그럼에도 어둠과 암울한 상황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왜일까.

그 해결 방안과 이유를 모두 다 알면서도 그리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아직도 나는 내 발 중에서 큰 쪽이 정상적인 지 작은 쪽이 바른 발인 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 해처럼달처럼 -


    미카 아게마츠-La Bik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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